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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문화유산 방재의 날 – 숭례문 앞에서 멈춘 마음 나는 불을 기억한다. 정확히는 불길 그 자체보다, 화면 너머에서 번지던 침묵을 기억한다. 2008년 겨울, 숭례문이 타들어가던 밤의 뉴스 장면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카메라는 붉은 불꽃을 확대했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말이 사라졌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문 하나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몸 어딘가가 함께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문화유산이라는 단어를 교과서에서만 배웠다. 하지만 그 불길 앞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문화유산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걸. 그날 이후 나는 유난히 오래된 것들에 시선이 갔다. 낡은 기와의 곡선, 비에 닳은 돌계단, 손때가 남은 문살. 그 앞에 서면 이상하게 내 몸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2025. 12. 15.
2월 3일 한국수어의 날 – 손끝에서 시작되는 감각의 언어 아침 출근길 횡단보도 앞 전광판에서 수어 통역 화면을 본 날이었다. 빨간 불이 켜진 동안, 화면 속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표정은 또렷했다. 나는 무심코 거울처럼 유리창에 비친 내 몸을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몸은 늘 먼저 반응한다. 긴 코트 아래로 이어지는 허리선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세하게 변했고, 장갑을 벗은 손가락 끝은 차가운 공기와 부딪혀 감각을 깨웠다. 요즘 뉴스에서도, 공공기관 안내에서도 수어 통역이 자연스레 붙어 있다. ‘왜 지금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언어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 소리가 지배하던 공간에 손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언어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읽는 것이라는 걸. 수어가 보인다는.. 2025. 12. 15.
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 아침, 온도, 돌아오는 길 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 오늘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하루였다. 북유럽의 선 굵은 라인과 한국인의 부드러운 곡선이 함께 있는 내 몸은 가끔 감정보다 먼저 진실을 알아채곤 한다. 봉사 현장의 공기, 손끝에 닿은 따뜻함, 온몸에 스며든 긴장과 이완의 흐름… 오늘 나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단순히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가 반응하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아침 창가에 서서 겨울빛을 받는 순간부터 이상했다. 햇살은 차갑게 빛나는데, 내 안쪽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 온도는 들뜸이라기보다 결심에 가까웠다. ‘오늘은 나가야 한다’는 말이 머리로 정리되기 전에, 몸이 먼저 방향을 정해 버리는 느낌. 거울 속의 나는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 아래 목선이 유난히 깔끔했고, 아이보리.. 2025. 11. 24.
12월5일 무역의 날, - 항만 야경, 무역, 컨테이너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항만의 밤에 서 있으면, 몸 안쪽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천천히 올라온다. 겨울 바다는 차갑고 공기는 매서운데, 그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뜨거운 숨결이 가슴 아래에서부터 밀려온다. 멀리서 낮게 울리는 엔진 소리와 크레인의 금속성 마찰음이 섞여 하나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에 내 심박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출항을 기다리는 선적선들이 내 호흡까지 함께 싣고 떠날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오늘은 12월 5일, 무역의 날. 숫자와 통계, 수출입 실적 같은 단어로만 기억되던 이 날짜가, 오늘만큼은 유난히 개인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금 이 항만의 풍경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세계라는 거대한 흐름에 겹쳐 보고 있었다. 수천 개의 컨테.. 2025. 11. 24.
12월5일 세계 토양의 날 – 아침 산책, 토층, 결심, 흙 위에서 다시 들은 심장의 소리 12월 초의 공기는 묘하게 예민하다. 차갑다고 해야 할지, 따뜻하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그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내 몸의 온도와 마음의 결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오늘, 우연히 마주친 세계 토양의 날은 그렇게 흔들리던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흙 위를 걷던 내 발끝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살아 있었다. 1. 아침 산책에서 들려온 심장의 울림몸을 가볍게 흔들며 산책을 하던 아침, 내 다리가 바람에 비벼질 때마다 미세하게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순간엔 내가 참 ‘살아 있다’는 감각이 확 올라온다. 그러다 공원 입구 근처에 꽂힌 작은 안내문을 봤다.12월5일 세계 토양의 날 — Soil is Life. 단순한 문구였는데, 그 글씨가 내 심장을 한 번 쿵 치더라.발끝 아래의 흙이 바삭하.. 2025. 11. 23.
12월 3일 소비자의 날을 지나며 - 택배 파손, 소비자의 날 몸의 온도가 마음의 온도를 흔들던 하루였다. 얇은 니트가 내 몸선을 은근히 드러내서였는지, 아니면 택배 상자 속 부서진 물건 때문인지… 하여간 오늘의 감정은 참기 힘들 만큼 요동쳤다. 이런 진폭 속에서 ‘소비자의 날’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은근히 적셨다. 1. 무너지는 순간 — 파손된 택배와 무력감의 그림자집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끝에 닿는 상자 표면의 온기보다 먼저 느껴진 건 왠지 모를 불안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그 불안은 부서진 조각들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내가 고른 예쁜 유리 화병은 산산이 깨져 있었고, 그 순간 내 안의 균형도 같이 무너져버렸다. 몸을 따라 흐르는 숨은 뜨거운데, 마음은 차갑게 뻣뻣해지는 기분. 마치 내 몸선을 감싸던 니트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느낌.. 2025.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