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태권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보급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이 날짜는 분명한 사건 위에 놓여 있다.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국기(國技)로 불리던 무예가 국제 스포츠의 규칙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이를 기념해 2006년 World Taekwondo Federation 정기총회에서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했고, 2007년 12월 21일 「태권도 진흥 및 공원 조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제정의 맥락은 단정하다. 올림픽, 국제화, 법제화라는 단어들이 한 줄로 이어진다. 나는 이 기념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이 날의 의미가 매번 내 감정과 같은 깊이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태권도의 날은 의무나 축제라기보다, 여러 세대의 시간이 겹쳐 있는 지점처럼 느껴진다. 의미는 분명한데, 그 의미가 내 몸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채 멈춰 서 있는 상태. 나는 그 상태를 매년 조금씩 다른 거리에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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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일상
아침에 옷을 고를 때, 손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얇은 끈이 달린 상의는 어깨를 가볍게 드러냈고, 짧은 치마는 허벅지의 길이를 숨기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잠시 멈췄지만 자세를 바로잡지는 않았다. 허리는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골반에 체중이 실린 상태가 더 편했다. 태권도장이라면 가장 먼저 지적받았을 자세였다. 곧지 않고, 긴장도 풀린 몸.
현관을 나서며 신발을 신는 동안,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앉았다 일어서는 짧은 동작인데도 근육이 즉각 반응했다. 발차기를 하지 않아도, 매트를 밟지 않아도, 몸은 어디에 힘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이 훈련의 기억인지, 아니면 지금의 체형이 만들어내는 무게감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허벅지는 늘 가장 먼저 나를 의식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다리가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치마 끝이 허벅지를 스치고, 그때마다 주변의 시선을 상상하게 된다. 실제로 누가 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몸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태권도의 날이라는 사실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드러난 몸으로 걷고 있다는 감각은 묘한 불일치를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는 곧게 서 있지 않았다. 어깨는 내려와 있었고, 무릎은 약간 굽혀진 채였다. 일부러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국기가 요구하는 단정한 신체와, 지금의 내 몸 사이에는 이미 거리가 생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들의 무심한 태도가 떠올랐다. 태권도의 날이 있는지도 모른 채 각자의 하루를 사는 얼굴들. 그 무심함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면서도 안도감을 주었다.
강해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칫한다. 이 몸이 강함을 증명해 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허벅지와 골반의 실루엣이 주는 인상과, 실제로 발차기를 올렸을 때의 체력은 전혀 다른 문제다. 태권도의 의미와 내 몸의 감각은 분리되어 있다. 중요하다는 사실과, 지금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그 분리를 억지로 메우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사는 데에는 이 몸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기억
태권도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또렷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국제 대회 영상 속에서, 태권도는 설명 없이도 이해되는 스포츠처럼 움직인다. 낯선 언어로 외쳐지는 구령, 서로 다른 체형의 선수들이 같은 규칙 안에서 발차기를 올리는 장면들. 그곳에서 태권도는 국적보다 기술로 먼저 읽힌다. 오히려 한국인인 내 몸은 그 장면들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해외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면 묘한 거리감이 생긴다. 태권도가 ‘우리 것’이라는 말은 분명한데, 그 우리 안에 지금의 나는 포함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학원 시간표에 끼워 넣어졌던 수업, 단증을 따고 사진을 찍던 날, 그리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었던 선택.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태권도는 여러 활동 중 하나였고, 핵가족의 일정 속에서는 쉽게 대체될 수 있었다.
미디어는 태권도를 국가 브랜드로 보여준다. 메달, 국기, 애국가. 그 이미지들은 단단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태권도는 흐릿하다. 정확한 각도보다는 중간에 쉬던 시간, 도복이 몸에 잘 맞지 않던 감각, 그리고 점점 멀어지던 관심이 먼저 떠오른다. 과거의 형식적 참여와 현재의 무관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한꺼번에 겹쳐 있다.
누군가는 태권도의 날을 자랑스러워하고, 누군가는 기념행사에 참여한다. 그 반응들 사이에서 나는 쉽게 자리를 정하지 못한다. 대표하지 않는 몸으로, 대표적인 기념일 앞에 서 있는 느낌. 이 어색함이 나를 계속 머뭇거리게 만든다.
기록과 미완
이 글을 쓰면서 자꾸 같은 문장이 돌아온다. 이 몸으로는 아직이라는 말.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아직 감당하지 못했고, 아직 수행하지 못했다는 감각. 그 문장은 핑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나는 태권도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내 삶을 그 가치에 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강해지지 않아도, 단정하지 않아도, 이 몸은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 그 사실을 긍정하는 감각과, 태권도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그러나 그 간극이 반드시 모순은 아니다. 서로 다른 리듬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몸으로는 아직이라는 문장을 반복하면서도, 그 ‘아직’ 뒤에 무엇을 덧붙이지 않는다. 언젠가를 약속하지도 않고, 태도를 명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상태를 기록해 둔다. 태권도의 날 앞에서,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다 이해하지는 못한 채로 서 있는 지금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