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은 통계의 날이다. 통계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 의식 수준을 높이고, 통계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해진 법정기념일이다. 2009년 4월 「통계법」 개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지정되었고, 날짜는 1896년 9월 1일에 처음 마련된 「호구조사규칙」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사람을 세고, 가구를 나누고, 지역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사회를 인식하기 시작한 날이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통계청은 이 의미를 기리기 위해 1995년부터 매년 기념행사를 이어오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유엔통계처가 2010년부터 10월 20일을 ‘세계 통계의 날’로 정해 통계의 공공성과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배경을 읽고 있으면 통계는 늘 단단하고 안정적인 언어처럼 느껴진다. 숫자는 흔들리지 않고, 기준은 명확하며, 사회는 그 숫자 위에서 결정을 내린다. 나 역시 통계가 없었다면 지금의 제도와 정책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통계는 설명을 가능하게 하고,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때로는 보호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통계의 날이 왜 필요한지 묻는다면, 머리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날짜가 다가올수록, 통계의 의미는 이상하게도 내 몸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문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 중요함이 매번 같은 깊이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통계의 날은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날이라기보다, 이 숫자들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서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게 만드는 날에 가깝다. 나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끝내 다 이해하지는 못한 상태로 이 날짜를 맞는다.

몸과 일상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이미 내 몸무게를 알고 있다. 전날 밤 욕실에서 확인한 숫자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 몸은 아직 잠의 잔여물 같은 것들을 안고 있는데, 숫자는 이미 깨어 있다.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볼 때도, 옷을 고르며 허리를 돌릴 때도, 그 숫자는 조용히 따라온다. 실제로 느껴지는 무게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숫자를 아는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면 몸의 윤곽이 더 또렷해진다.
수업에 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설 때, 가방을 멜 때,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은 평소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자꾸 몸을 평가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허벅지가 계단에서 어떻게 힘을 받는지, 숨이 얼마나 빨리 차오르는지 같은 감각들이 숫자와 연결된다. 마치 몸이 스스로를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처럼.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자세가 더 의식된다. 다리를 모으면 허벅지가 의자에 닿는 면적이 느껴지고, 다리를 풀면 주변의 시선이 괜히 신경 쓰인다. 실제로 누군가 보고 있지 않아도, 몸은 이미 반응한다. 또래들은 각자 화면을 내려다보거나 노트를 정리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어떤 값으로 분류될 수 있는 몸인지 자꾸 떠올린다. 키와 체중, 연령대 같은 항목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점심을 먹고 나면, 같은 숫자임에도 몸의 감각은 또 달라진다. 배가 조금 차오른 상태에서는 몸무게 숫자가 더 크게 느껴지고, 오후가 지나 몸이 지칠수록 그 숫자는 묘하게 무거워진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는데, 하루 안에서도 몸은 여러 번 다른 상태가 된다. 그 변화는 통계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쉬는 동안 휴대폰에 설문조사 알림이 뜬다. 참여를 부탁한다는 문구와 함께, ‘여성’, ‘20대’, ‘학생’이라는 선택지가 보인다. 체크박스를 누르는 순간, 나는 다시 숫자로 옮겨진다. 몸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고, 다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데, 화면 속에서는 이미 요약된 상태다. 통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과정에 내 몸이 들어가는 순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생긴다. 숫자를 알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몸이 숫자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와 기억
통계 속의 여성은 늘 정돈되어 있다. ‘20대 여성’, ‘여성 고용률’, ‘여성 1인 가구 비율’. 이런 항목들은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언어다. 나 역시 그 통계들이 만들어낸 변화와 보호를 알고 있다. 숫자가 있었기에 보이지 않던 문제가 드러났고,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도 배워왔다.
하지만 통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다. 그 여성은 평균값에 가깝고, 그래프 위에서 안정적으로 위치한다. 반면 실제의 나는 평균과 어긋난 감각을 더 자주 경험한다. 몸무게 숫자를 아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감각, 이유 없이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 통계에는 없는 미세한 흔들림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학교에서 배운 통계는 늘 객관성과 중립성을 강조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배웠고, 감정은 배제해야 할 요소처럼 취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을 묻고 무엇을 묻지 않는지도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계가 말해주지 않는 영역에 남겨지는 몸과 감각이 있다는 것도.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여성에 대한 통계는 점점 더 세분화되었다. 그만큼 사회는 여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이해가 늘 체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뉴스 자막과 보고서 속의 숫자들은 분명 설득력이 있지만, 그 숫자들 속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누군가는 통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그 수치를 근거로 사회적 결의를 말한다. 나는 그 장면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다. 통계 속 여성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 사이의 거리감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통계는 나를 설명하지만, 내 하루를 전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기록과 미완
숫자로 불릴 때, 나는 묘한 노출감을 느낀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미 많은 것을 말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몸은 옷으로 가려져 있고, 사적인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값으로 불리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더 투명해진다. 그 노출감은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정리되어 버렸다는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통계의 날에 대해 쓰면서도, 통계의 의미를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통계 앞에서 자꾸 멈추는 내 태도를 기록하고 싶다. 통계가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과, 내가 그 통계 안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불편함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그 사이에서 머뭇거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다.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비공식적인 통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의 사례, 하나의 기록. 하지만 이 기록은 평균값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균으로는 담기지 않는 상태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몸무게 숫자를 알고 하루를 사는 감각, 통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분류, 숫자로 불릴 때 생기는 미묘한 노출감. 이 세 가지는 오늘의 나를 설명하는 단서들이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묶이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 이 감각들을 명확한 태도로 정리하지 못한다. 다만 9월 1일이라는 날짜 앞에서, 이렇게 앉아 있었고, 이렇게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어 둔다. 통계의 날은 해마다 돌아오겠지만, 그때마다 내가 같은 위치에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은 결론을 미룬다. 이 미완의 상태 자체가, 오늘의 나에게는 가장 솔직한 기록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