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가 기록으로 남는 방식
8월 14일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법정기념일이다. 이 날짜의 직접적인 계기는 1991년 8월 14일, 피해자였던 김학순이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사건에 있다. 개인의 말이 처음으로 사회의 기록이 되었고, 오랫동안 침묵으로 덮여 있던 일이 공적인 언어를 얻은 순간이었다.
그 이후 제도는 이 증언을 따라 움직였다.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 제정되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후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관련 법률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고, 2017년 12월 12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8월 14일이 공식적인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18년 8월 14일에는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첫 정부 기념식이 개최되며, 이 날짜는 국가 일정 속에 분명히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은 정리되어 있고, 설명 가능하며, 중요하다. 문제는 이 설명들이 매년 돌아오는 8월의 하루와 정확히 포개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록은 분명한데, 그 기록 앞에 서 있는 나의 상태는 늘 흔들린다. 이 날짜가 요구하는 태도와, 실제로 이 날짜를 통과하는 나의 몸 사이에는 늘 작은 어긋남이 남는다.

방학 중 자취방, 누운 몸의 현재
방학 중인 어느 날, 자취방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다. 에어컨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얇은 이불을 배 위에 올린다. 여름 한가운데인데도 실내는 조금 차갑고, 피부에는 샤워 직후의 물기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몸은 힘을 빼고 바닥에 맡겨져 있고, 이 자세는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진다.
이 방은 안전하다. 잠글 수 있는 문이 있고, 불을 끄고 누우면 외부의 시선은 완전히 차단된다. 방학 중의 느슨한 리듬, 혼자만의 공간, 보호된 환경은 지금의 내가 얼마나 안정된 상태에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8월 14일이라는 날짜를 떠올리면, 이런 안전이 얼마나 오랜 시간 당연하지 않았는지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누운 자세에서는 몸의 윤곽이 더 분명해진다. 숨이 배까지 내려오고, 얇은 옷 사이로 허리와 골반의 곡선이 느껴진다. 이 몸은 건강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 다만 이 기념일 앞에서는, 이 편안함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도 되는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불편함을 느끼는 나와, 그대로 누워 있는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또래들의 태도를 떠올리면 이 감정은 더 분명해진다. 누군가는 여행 중이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이 날짜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 역시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 날짜가 내 일상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이 분리된 상태를 인정하는 순간, 나는 이 기념일 앞에서 이미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거울 앞에서 멈추는 시간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거울 앞에 선다. 머리를 말리기 전의 짧은 공백,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생긴다. 물기가 아직 남은 피부 위로 욕실의 불빛이 고르게 내려앉고, 거울 속의 나는 또렷하다. 어깨선은 분명하고, 허리는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으며, 다리는 여름에 익숙한 자세로 균형을 잡고 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는 사실이 설명 없이도 드러난다.
평소에 이 시선은 기능적이다. 옷이 잘 맞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하지만 8월 14일이라는 날짜가 겹치면, 이 시선은 갑자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성의 몸’이라는 말이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불려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폭력, 강제와 침묵의 맥락 속에서 이 단어가 얼마나 자주 대상화되어 왔는지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해는 감정의 깊이로 곧장 내려가지 않는다. 거울 속의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보호받지 못했던 몸의 재현도 아니다. 지금 여기의 나는, 안전한 욕실과 잠글 수 있는 문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이 명백한 차이는 나를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거리감을 만든다. 애도해야 할 역사와, 살아 있는 현재의 몸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서 있지 않다.
거울 앞에서 나는 언어를 떠올린다. ‘강제 동원’, ‘성노예’, ‘명예회복’ 같은 말들은 이 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들이 과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말들은 주로 과거를 향해 있고, 이 거울 속의 현재를 직접 겨냥하지 않는다. 그 간극 속에서 나는 내가 이 날짜를 너무 가볍게 통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일부러 감정을 끌어올리고 싶지는 않다. 슬픔이나 분노를 연습처럼 반복하는 것이 이 기념일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거울 앞의 정지는, 오히려 내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고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 상태, 그 미완의 인식이 이 날짜 앞에서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면 이 정지는 끝난다. 수건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의 속도로 돌아간다. 거울 속의 나는 변하지 않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이 기념일이 요구하는 태도와 내가 실제로 취하고 있는 태도 사이를 분명히 보았다. 그 차이를 해소하지 않은 채로 욕실을 나온다.
반복되는 노동과 기록의 이유
며칠 뒤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서서 일하는 동안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손은 생각보다 정확하게 움직인다. 몸은 현재의 리듬에 완전히 들어가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기림’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돈다.
기념일은 멈춤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은 멈추지 않는다. 이 반복 속에서 과거의 폭력과 현재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감사의 말을 하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건넨다. 그 사이에서 나는 이 날짜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선택 역시 지금의 태도다.
왜 굳이 이 기념일에 대해 쓰고 있는지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도, 더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지금의 내 몸이, 안전한 방과 거울,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이 날짜를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남기고 싶어서다.
나는 지금의 삶을 긍정하고 있다. 여름의 더위, 방학의 느슨함, 반복되는 일상. 동시에 이 기념일이 담고 있는 폭력의 역사와 그 무게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이 둘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 몸 안에서 동시에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나는 자주 균형을 잃는다.
이 글은 어떤 의미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태도를 명명하지도, 앞으로의 나에게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8월 14일 앞에서 나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를 산다. 그 미완의 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나이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