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시험도 없고, 약속도 없고, 누군가에게 꼭 연락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하루의 감각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는 대신, 이불 속에서 잠깐 몸을 뒤척였다. 피부에 닿는 시트의 촉감이 생각보다 따뜻했고, 어제보다 공기가 무거운 것 같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바람은 시원하다기보다는 미지근했고, 밤새 켜 두었던 선풍기 때문에 방 안에는 눅눅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별일 아닌 감각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오늘 하루는 괜히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는데, 물기 섞인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느낌이 싫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덥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이 더위가 어디서 왔는지 괜히 따져보고 싶어졌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깨와 목 주변이 쉽게 축축해지는 게 신경 쓰였다. 옷을 고르면서도 고민이 길어졌다. 얇은 옷을 입으면 더위를 덜 탈 것 같으면서도, 실내의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생각하면 또 망설여졌다. 이런 사소한 선택의 반복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집을 나서기 전, 가방에 텀블러를 넣었다. 습관처럼 챙겼지만, 사실 오늘은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강의 사이 짧은 쉬는 시간에 커피를 사 마실 가능성이 높았고, 그때 텀블러를 꺼내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넣어두는 행동 자체가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이런 기분들은 나중에 곱씹을수록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6월 5일, 환경의 날이었다. 그 사실이 이 모든 감각들을 괜히 의미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환경의 날, 거대한 선언의 시작
환경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기념일이 아니다. 1972년, 지구환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최초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에서 세계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환경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올려두었다. 그전까지 환경은 개발과 성장의 부수적인 문제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공기와 물, 토양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났고,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생활 터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유엔인간환경선언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지금 읽으면 교과서적인 문장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인간의 편리함과 경제적 성장보다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먼저 고민하자는 발상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되었고, 각국은 이 날을 계기로 환경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9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6월 5일을 환경의 날로 정했다. 국민의 환경보전 의식을 함양하고, 실천을 생활화하기 위함이라는 취지가 함께 담겼다.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솔직히 현실감이 없다고 느꼈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너무 크고, ‘의식 함양’이라는 표현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선언은 결국 지금의 나처럼 평범한 개인의 일상으로 흘러들어 와야만 의미를 가진다. 역사 속의 회의장은 멀리 있지만, 그때 던져진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실천을 생활화하라는 말의 무게
환경의 날이 다가오면 늘 비슷한 메시지들이 반복된다. 분리수거를 잘하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자, 친환경 소비를 하자. 이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정답 같아서 부담스럽다.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환경을 완벽하게 고려한 선택보다 편한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훨씬 많다. 강의가 끝난 뒤 허기를 참지 못해 포장 음식을 사 먹을 때, 비닐과 플라스틱 용기를 분리해 버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실천을 생활화하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조용히 책임을 요구한다. 마치 개인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말은 때때로 무력감을 동반한다.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를 하려면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환경의 날이라는 단어 자체를 피하고 싶어지는 날도 있다. 알고 있지만 다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부끄러워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밤에도 쉽게 식지 않는 열기가 피부에 남는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공기는 예전처럼 상쾌하지 않고, 에어컨 바람 없이는 하루를 버티기 어려워졌다. 이런 감각들은 뉴스 기사보다 먼저 나에게 도착한다. 그래서 환경 문제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실천이 버겁게 느껴질수록, 환경의 날은 오히려 더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도 오늘을 살아가는 몸으로서의 나
나는 환경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환경의 날 하루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 아침 느꼈던 공기의 무게와 피부에 들러붙던 더위는 분명히 진짜였다. 텀블러를 가방에 넣으면서도 결국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그 망설임 역시 진짜 감정이었다. 환경의 날은 그런 감각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는 날인 것 같다. 거창한 다짐보다는, 이미 느끼고 있는 것들을 인정하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1972년의 회의장에서 시작된 질문은 1996년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더 이상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라, 내 몸을 통해 체감되는 현실이 되었다. 더워진 여름, 불안정해진 계절, 공기의 질감은 모두 연결된 이야기의 일부다. 나는 여전히 편한 선택을 하고, 때로는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변화를 몸으로 기억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의 환경의 날은 다짐보다는 자각으로 남는다. 내 하루와 지구의 하루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내가 느끼는 불쾌함과 더위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고, 조심스럽게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완벽하지 않아도, 느끼고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