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은 철도의 날이다. 지금의 날짜는 9월 18일이 아니라 6월 28일로 바뀌어 있다. 원래 철도기념일은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개통된 날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1964년 「철도의 날에 관한 규정」에 따라 9월 18일이 공식적인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포함되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하지만 2018년 개정으로 날짜는 다시 이동했다. 철도국이 설립된 1894년의 날짜를 기준으로 삼으며, 철도의 날은 6월 28일이 되었다. 기념일의 기준이 ‘처음 달린 날’에서 ‘관리 체계가 만들어진 날’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무엇을 기억의 중심에 둘 것인가에 대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철도의 날은 기간교통 수단으로서 철도의 의의를 높이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명된다. 이 문장은 틀리지 않다. 철도는 산업화의 속도를 실질적으로 끌어올린 구조였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국가의 동선을 재편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있다. 중요한 날이라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그 의미가 감정으로 곧장 내려오지는 않는다. 이 날짜는 내 삶에서 의식을 요구하는 명령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의 시간이 포개진 지점에 가깝다. 그 포개진 자리 앞에서 나는 늘 멈추거나, 혹은 지나친다.

플랫폼에서 차내까지, 느리게 지나가는 몸
개찰구를 통과해 계단을 내려갈 때, 발목과 종아리에 먼저 무게가 실린다. 계단의 각도가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한다. 플랫폼에 도착하면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지상보다 약간 차갑고, 금속과 먼지가 섞인 냄새가 코끝에 걸린다. 바닥은 단단하고 평평하지만, 오래 서 있으면 발바닥이 서서히 아려온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몸은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속 미세하게 자세를 조정하고 있다.
열차가 들어오기 직전, 선로 쪽에서 바람이 먼저 밀려온다.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고, 치마 자락이 다리에 붙었다 떨어진다. 이 순간마다 나는 나의 몸이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깐 의식한다. 실제로 누가 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어깨는 조금 더 펴지고, 다리는 괜히 가지런해진다. 철도의 날이라는 말은 이 순간의 몸에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단지 서 있고, 기다린다.
차내로 들어서면 공간은 갑자기 좁아진다. 손잡이를 잡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릴 때 어깨 근육이 당기고, 중심을 잡기 위해 복부에 힘이 들어간다. 열차가 출발하며 몸이 살짝 뒤로 밀릴 때, 허리와 골반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흔들림은 규칙적이지만 완전히 예측되지는 않는다. 몇 정거장을 지나면 다리는 무겁게 느껴지고, 발끝에 체중을 싣는 방식이 바뀐다. 옆에 선 사람들과의 거리는 가깝지만, 서로의 존재는 투명하다. 다들 휴대폰 화면 속으로 시선을 접어 넣는다. 이 이동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그래서 특별하지 않다.
도착을 앞두면 몸은 먼저 신호를 받는다. 다음 역 안내 방송이 나오기 전부터, 손에 실린 힘이 조금씩 풀리고, 시선은 출입문 쪽으로 이동한다. 아직 내릴 차례가 아닌데도 몸은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철도의 날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 몸은 이 기념일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그 분리는 오히려 편안하다. 중요한 의미와 개인의 감각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때마다 확인한다.
제도의 언어로 남은 철도
철도는 언제나 제도의 언어로 설명되어 왔다. 기간교통 수단, 국가 기반시설, 공공 인프라. 이 단어들은 정확하고 단단하지만, 동시에 거리감이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철도는 숫자와 연도로 정리된 대상이었고, 노선도는 색깔로 구분된 선들의 집합이었다. 그 언어 속에서 철도는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관리되는 체계였다. ‘의의를 높인다’는 표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지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기념일의 날짜가 9월 18일에서 6월 28일로 바뀐 과정은 특히 제도적이다. 실제로 열차가 처음 달린 날보다, 철도국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철도를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기억하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 선택은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감정의 여지를 좁힌다. 산업화와 도시화, 효율과 통제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철도는 개인의 경험보다 국가의 시간표에 더 가까워진다.
미디어에서 철도는 종종 상징으로 등장한다. 출근길의 풍경, 명절 귀성의 혼잡, 지연 사고에 대한 불만. 뉴스 속 철도는 늘 기능적이다. 잘 작동하는지, 문제가 생겼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종사자들의 얼굴은 주로 사고나 파업의 맥락에서만 드러난다. 그 노동은 추상화된 채로 ‘노고’라는 단어에 묶인다. 나는 이 언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동시에, 이 언어들만으로는 내 감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학창 시절, 철도의 날은 달력 한쪽에 적힌 작은 글자였다. 시험 범위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기억도 희미하다. 그날이 지나가도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비슷하다. 철도의 날이라는 제도적 언어는 나에게 중요한 사실로 남아 있지만, 생활의 리듬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 거리감은 무관심이라기보다, 언어의 층위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에 가깝다.
왜 쓰는지 묻는 자리에서
이쯤에서 다시 묻게 된다. 왜 나는 굳이 이 기념일에 대해 쓰고 있는가. 철도의 날은 나에게 감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감사의 말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글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나는 이 날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이, 왠지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질 것 같아서.
내 몸은 철도의 혜택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고, 그 덕분에 하루의 동선을 유지한다. 이 구조가 없다면 지금의 삶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기념일을 온전히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무시도, 거부도 아니다. 다만 지금의 상태다.
쓰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이나 멈춘다. 이 정도의 거리감이 무례한 것은 아닌지, 혹은 너무 개인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들 역시 나의 현재를 구성한다. 철도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 삶의 리듬과 어긋나 있음을 기록하는 일. 이것은 태도의 문제이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은 결론을 만들지 않는다. 철도의 날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정리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이동하고 있었지만 머물러 있던 나의 상태를 남긴다. 이 상태는 언젠가 달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이 날짜 앞에서 이렇게 서 있었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는다. 그 기록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