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은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다.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과 같은 날짜로,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12월 29일 「노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범국민적으로 노인학대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관심을 유도하기 위함이라는 제정 이유는 문장만 놓고 보면 단정하고 명확하다. 이 날을 기준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기념행사와 홍보를 진행하도록 되어 있고, 관련 자료는 매년 비슷한 형식으로 배포된다.
하지만 이 날짜가 내 하루에 들어오는 방식은 늘 일정하지 않다. 어떤 해에는 뉴스 자막으로 스쳐 지나가고, 어떤 해에는 지하철 벽면의 포스터로 잠깐 시야에 들어온다.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노인학대라는 단어가 가볍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기념일이 늘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아직 이 문제가 나의 현재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학대 예방의 날은 축하의 대상도, 분명한 추모의 대상도 아니다. 대신 이 날은 시간과 세대가 겹치는 지점에 조용히 놓여 있다. 이미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과, 지금 그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은 멀게 느끼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느린 발걸음과 빠른 하루 사이
아침 등굣길은 늘 비슷하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동개찰구를 통과하면서 가방끈을 고쳐 맨다. 몸은 아직 가볍고, 걸음은 빠르다. 오늘 입은 옷은 내 몸에 잘 맞고, 움직일 때 특별히 신경 쓰이는 부분도 없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익숙하고, 그 익숙함은 이 나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안정감처럼 느껴진다.
계단 위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노인의 뒷모습을 지나칠 때,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 장면은 특별하지 않고, 그저 도시의 풍경 중 하나다. 가끔은 시선이 머무는 순간이 있다. 젊은 몸이 받는 시선과, 노인의 몸이 받는 시선은 분명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직은 이 차이를 생각하기보다 흘려보내는 쪽이 더 익숙하다.
또래 친구들과 노인학대 예방의 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다. 단체 채팅방에서는 시험 일정과 아르바이트 이야기, 여행 계획이 오간다. 캘린더에 표시된 기념일은 알림처럼 지나가고, 누군가는 “요즘은 무슨 날이 이렇게 많아”라며 가볍게 말한다. 그 피로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 뒤에 남겨진 공백도 분명 존재한다.
내 몸의 감각과 이 기념일의 사회적 의미는 아직 분리되어 있다. 학대라는 단어는 멀고, 노인이라는 말은 가족 호칭 속에서만 구체적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은 떠오르지만, ‘노인’이라는 집단적 단어는 여전히 추상적이다. 그래서 이 날은 아직 나에게 현실보다는 개념에 가깝다.
법과 교실에서 배운 날의 의미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 담고 있는 핵심 가치는 분명하다.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것, 폭력은 신체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정서적 무시와 방임, 경제적 착취까지 포함한다는 사실. 산업화와 도시화,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돌봄의 구조는 바뀌었고, 노인학대는 점점 더 은밀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숨어들었다. 통계로는 드러나지만, 일상의 언어로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이 주제를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것은 시험 범위 안의 문장이었다. 학대의 유형을 외우고, 예방의 중요성을 적었다. 그때의 나는 이해보다는 암기에 가까웠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배경을 알고 있다.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 국가가 왜 개입해야 하는지, 사회가 왜 책임을 나눠야 하는지. 하지만 지식이 늘어난 만큼 감정이 단순해지지는 않았다.
SNS에서 스쳐 지나간 기사 하나가 마음을 붙잡은 적이 있다. 요양시설에서의 방임, 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무시. 댓글은 잠시 분노로 채워지다가, 금세 다른 이슈로 넘어간다. 그 빠른 전환을 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문단 안에서 겹치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관찰자의 위치에 있지만, 언젠가는 이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스며든다.
기록하려는 이유, 아직 미완인 생각
왜 나는 굳이 노인학대 예방의 날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명확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나, 내 몸과 삶을 긍정하려는 태도는 때로는 이 기념일이 담고 있는 무거운 메시지와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은 젊고, 아직은 보호받는 쪽에 가까운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두 태도는 완전히 모순되지는 않는다. 나의 현재를 긍정하는 일과, 미래의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존엄을 상상하는 일은 같은 선 위에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어떤 태도로 이 시간을 기억할 것인가이다. 이 날을 의무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한 번쯤 속도를 늦춰 생각해보는 태도.
이 글의 결론을 정리하려다 보면,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노인학대 예방의 날은 나에게 여전히 형성 중인 인식이다. 분명해진 답보다, 남겨두고 싶은 질문이 더 많다. 이 날이 언젠가 내 삶의 다른 위치에서 다시 읽힐 수 있도록, 지금의 생각을 기록해 둔다. 독자 각자의 시간과 몸이 이 문장 사이에 들어와, 각자의 기억을 덧붙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