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아침, 창문을 열면 공기가 다르다. 아직 여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른데, 햇빛은 유난히 말랑하고 소리는 분주하다. 아파트 놀이터 쪽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 부모들이 급하게 아이 손을 잡고 내려오는 발소리, 풍선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까지. 어린이날의 풍경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제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어린이날 선물”을 받는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날이 오면 몸이 먼저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 입었던 원피스, 살짝 큰 운동화, 엄마가 묶어주던 머리끈의 촉감 같은 것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서 나를 바라본다. 여성으로서의 몸, 대학생의 일상, 성숙해진 생각들. 그런데 어린이날만 되면, 그 모든 위에 아주 오래된 질문 하나가 덮인다. 어린이날은 정말 아이를 위한 날일까, 아니면 어른을 위한 날일까.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쉬는 이 날은, 공휴일이라 수업도 없다. 하지만 거리의 주인공은 분명 나가 아니다. 유모차를 미는 부모, 아이 손을 놓지 않으려는 어른들, 아이보다 더 지친 얼굴의 어른들. 아이들은 웃고 있는데, 어른들은 너무 바쁘다.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날의 중심은 아이인데, 이 날의 무게는 어른이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나는 어린이날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단순히 추억이 아니라,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왜 이 날이 필요했고, 왜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 그 질문에서 이 글은 시작된다.

1. 아이를 ‘존재’로 부르기 시작한 날
어린이날은 처음부터 축제가 아니었다. 놀이공원도, 선물도, 휴일도 아니었다. 그 시작에는 ‘어린이 애호사상’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에는 선언이 필요할 만큼 낯선 개념이었다.
어린이날의 기원은 천도교 소년회에서 시작된다. 아이를 단순히 어른의 소유물이나 노동의 일부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이후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 날’을 공식적으로 제정하면서, 어린이는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그 이름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그냥 ‘어린이’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지금의 나는 내 몸을 긍정하고, 내가 어떤 모습이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가능해지기까지, 이 사회는 얼마나 많은 선언을 거쳐왔을까. 어린이날은 아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날이기 이전에, 어른이 스스로의 시선을 고치기 위한 날이었다.
어린이를 사랑하자는 말은, 아이에게 뭔가를 더 주자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존재’로 인정하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하다.
2. 흔들린 날짜, 흔들린 시대
어린이날은 처음엔 5월 1일이었다. 그러다 1928년부터 5월 첫째 주 일요일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날을 고민한 결과였다. 그 변화는 배려였고,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1937년, 일제의 소년단체 해산 명령으로 어린이날은 중단된다. 기념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날짜 삭제가 아니었다. 아이를 이야기하는 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래 멈췄다. 아이의 권리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 시대는, 늘 불안한 시대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1946년, 어린이날은 다시 시작된다. 그 해 5월 첫째 주 일요일이 바로 5월 5일이었고, 이후 날짜의 혼란을 막기 위해 5월 5일로 고정된다. 이 선택은 단순하지만 강했다. 어린이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는 선언 같았다.
이후 어린이날은 법과 제도로 자리를 잡는다. 1973년 법정기념일, 1975년 법정 공휴일, 1981년 아동복지법에 의해 공식 지정. 이 과정은, 사회가 아이를 보호하는 책임을 제도적으로 인정해온 기록이다.
나는 지금 너무 자연스럽게 이 날을 쉰다. 하지만 이 쉬는 하루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어린이날은 늘 아이보다 시대가 먼저 흔들렸던 날이었다.
3. 그래서, 어린이날은 누구의 날일까
다시 오늘의 어린이날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여전히 웃고, 어른들은 여전히 바쁘다. 선물은 많아졌지만, 기다려주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스무 살의 나는, 이제 보호받는 쪽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서 있다. 여성으로서의 몸을 긍정하고,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느낀다.
어린이날은 아이에게 웃음을 주는 날이다. 하지만 그 웃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어른이다. 아이를 존중하는 태도,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인내, 아이를 한 사람으로 대하는 시선. 그 모든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이날은 아이를 위한 날이 맞다. 하지만 동시에, 어른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어른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날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더 나이를 먹고, 어린이를 지켜보는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5월 5일이 단순한 휴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어린이날은 기억의 날이 아니라, 책임의 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이미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