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보건의 날을 떠올리면, 나는 병원 대기실의 냄새보다 스마트폰 화면의 푸른 빛이 먼저 떠오른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이 된 이후, 몸은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길게 뻗은 다리, 단단한 허벅지, 운동을 꾸준히 한 사람 특유의 안정적인 골반과 허리 라인. 거울 속의 나는 분명 ‘괜찮아 보이는 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늘 한 박자 늦게 따라온다. 아프지 않은데도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지는 순간들. 숨이 조금 가쁘면 심박수 앱을 켜고, 눈이 피곤하면 수면 시간 통계를 넘겨본다. 보건의 날은 원래 국민의 보건의식을 높이고, 보건의료와 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 날은, 아프지 않아도 불안해하는 세대의 마음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건강은 이제 ‘문제없음’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스무 살의 몸은 젊고 탄탄하지만, 그만큼 쉽게 흔들리는 마음을 함께 안고 있다.

병원보다 앱을 먼저 여는 스무 살의 일상
대학생이 된 뒤 병원에 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건강 관련 앱을 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칭을 하며 허벅지 근육의 당김을 느끼고, 복부에 힘을 주며 오늘의 컨디션을 가늠한다. 강의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차오르면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른다. 괜찮다, 아직은.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늘 작은 파동이 일어난다. 증상이 없어도 불안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늘 비교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SNS 속에는 완벽한 몸, 완벽한 루틴, 완벽한 자기 관리가 넘쳐난다. 나 역시 여성적인 몸을 긍정하고 드러내는 편이지만, 동시에 이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계산하게 된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밤 산책, 따뜻한 샤워, 요가 매트 위에서 느리게 늘어나는 몸의 곡선. 그 순간만큼은 허리와 골반, 다리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숨을 쉰다. 아프지 않아도 스스로를 돌보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이 세대가 보건을 대하는 방식이다. 1948년 4월 7일이 세계보건기구 헌장 비준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건강이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조건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보이지 않는 아픔이 일상이 된 세대
나는 불면증을 겪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라는 이름의 긴 터널을 지나오며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버렸다. 잠자리에 누우면 머릿속에서는 끝나지 않은 하루가 다시 재생된다. 그때의 스트레스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낮에는 예민해지고, 생리통이 심한 날이면 하복부에서 시작된 통증이 허벅지 안쪽까지 이어진다. 겉으로 보기엔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는 스무 살의 몸이다. 하지만 정신건강, 수면장애, 만성피로는 이제 청년층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흔해서 말하지 않게 되는 종류의 아픔이다. 1973년 여러 보건 관련 기념일이 하나로 통합되어 ‘보건의 날’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몸의 일부만 떼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라보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여성적인 몸을 가진 나는 이 사실을 더 절실히 느낀다. 예쁘게 드러나는 곡선 뒤에는 긴장과 피로가 함께 쌓여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아픔을 개인의 약함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 보건의 날은 그런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치료보다 먼저, 안심을 말하는 보건의 날을 바라며
4월 7일 보건의 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날은 치료의 날이 아니라, 예방과 안심의 언어를 나누는 날이어야 한다. 젊은 세대는 아직 아프지 않다. 하지만 늘 불안하다. 그래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맘 편히 숨 쉬고, 몸을 믿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건의 날이 단지 기념식에 그치지 않고, 청년들의 마음을 살피는 제도로 이어지길 바란다. 스무 살의 나는 아직 젊고, 몸은 단단하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긍정하고 싶다. 동시에 이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보호받고 싶다. 보건의 날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느끼는 불안 역시 돌봄의 대상이라고. 그 말 한마디가 이 세대에게는 가장 큰 예방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