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 몸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강의실로 가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고르고, 어깨선과 허리선을 살피며 오늘의 나를 확인하는 순간들.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대학생의 하루 한가운데, 달력 속 ‘4월 3일’이라는 숫자가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4·3희생자 추념일. 분명 교과서에서 본 단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기억이 흐릿했고 감정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숨 쉬고, 걷고, 내 몸의 감각을 또렷이 느끼는 지금의 내가 이 날짜를 다시 마주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무거웠다. 교과서 밖에서, 아주 개인적인 질문 하나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름, 다시 마주한 순간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나는 빠르게 지나갔다. 시험 범위에 포함된 사건명, 연도, 그리고 체크 표시 하나. 제주4·3은 그렇게 ‘외워야 할 과거’로만 존재했다. 그 시절의 나는 내 몸이 변하는 것에 더 예민했고, 시선과 평가 속에서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했다. 교복 아래 숨겨진 몸과 마음은 늘 긴장 상태였고, 제주라는 섬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지금, 강의실과 캠퍼스를 자유롭게 오가며 내 몸을 스스로 선택한 옷으로 드러내고, 나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그 이름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수업 중 스쳐 지나간 ‘4·3’이라는 단어가 귀에 남았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맴돌았다. 왜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제주4·3은 단순한 사건명이 아니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진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 속에서 수많은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된 비극이었다. 숫자로만 보면 길고 복잡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 평범한 하루를 살던 몸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내가 누리는 이 일상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다리, 숨을 깊게 들이마실 수 있는 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함. 그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검색창 앞에서 터져 나온 혼란과 분노
그날 밤, 노트북을 켜고 ‘제주 4·3’을 검색했다. 화면에 쏟아지는 문장들, 사진들, 증언들. 읽을수록 머리가 어지러웠고, 감정은 통제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왜 이렇게 오래 침묵했을까. 분노는 단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나 자신에게도 향했다. 2013년 6월 27일 국회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하며, 매년 4월 3일을 추념일로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사실. 그리고 2014년 3월 24일, 「기념일규정」 일부 개정으로 법정기념일이 되었다는 흐름. 이 모든 과정이 ‘화해와 상생’을 위한 것이라는 문장을 읽으며,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자료를 읽다 잠시 멈추고,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오늘 하루를 버텨낸 내 몸이 느껴졌다. 허벅지의 긴장, 허리의 곡선, 그리고 숨을 고르며 가라앉는 심장 박동. 이 몸으로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죄책감처럼 다가왔다.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추념일이라는 설명이, 단순한 제도적 문장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야 이걸 제대로 보게 된 걸까. 검색창을 닫고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완벽히 몰라도, 질문을 멈추지 않기로
며칠이 지나도 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형태를 바꿨다. 처음의 분노는 질문으로, 자책은 다짐으로 옮겨갔다. 나는 아직 제주4·3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벽한 이해를 핑계로 침묵하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이라는 것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계속해서 기억하려는 태도 자체가 추모의 시작이라는 것을.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내 몸을 긍정하려 애쓰면서도, 세상의 무게 앞에서는 자주 작아진다. 그렇지만 오늘의 나처럼,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다. 4월 3일 4·3희생자 추념일은 나에게 더 이상 교과서 속 한 줄이 아니다. 지금을 사는 내가 어떤 자세로 서 있을 것인지를 묻는 날이다. 교과서 밖에서 시작된 나의 첫 질문은, 그렇게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