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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과학의 날에 대해 ― 숫자와 공식 사이에서 살아남기

by JiwonDay 2025. 12. 30.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몸이 먼저 깨어 있었다. 전날 밤, 통계 과제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노트북 위에 엎드린 채 잠들었기 때문이다. 20살, 여대생 지원이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화장은 최소한으로, 대신 거울 앞에서 몸선을 한 번 훑어본다. 어제보다 어깨가 조금 더 단단해 보이고, 허리 라인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곡선을 유지하고 있다.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짧은 순간이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한다. 과학은 내게 낭만이 아니다. 공식은 위로가 되지 않고, 숫자는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과학을 배운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4월 21일 과학의 날이 다가오면 학교는 유난히 분주해진다. 포스터가 붙고, 세미나 공지가 쏟아진다. 하지만 내 일상은 여전히 시험, 과제, 발표의 연속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 인식을 높이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거창한 제정 이유는, 나 같은 학생에게 내려오면서 아주 개인적인 압박으로 바뀐다. ‘잘해야 한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이 수식처럼 따라붙는다. 과학의 날은 기념일이지만, 내겐 점검일에 가깝다. 내가 이 체력으로, 이 집중력으로, 이 몸으로 오늘도 버틸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날이다.

1934년, 찰스 다윈 서거 50주년을 맞아 처음 과학데이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교양 수업에서 들었다. 그때의 과학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였을 것이다. 1969년, 과학기술처 개청일인 4월 21일이 과학의 날로 지정되며 국가는 과학을 성장의 엔진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세계 기상의 날까지 통합하며 과학의 범위를 넓혔다. 역사 속 과학은 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앞으로 가는 힘을 개인의 밤샘과 체력에서 끌어다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과학의 날을 기념하며 솔직한 생존기를 쓰기로 했다.

세 개의 프레임 속 여대생은 시험과 과제의 밤, 사회적 기대 앞의 단단한 시선, 그리고 노을 아래의 해방감을 몸으로 표현한다. 숫자와 공식 사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살아가는 과학의 얼굴이다.

 

과학의 날이 말하는 국가와 개인의 기대

국가는 과학에 많은 것을 기대해왔다. 산업을 키우고, 기술로 경쟁력을 확보하며, 미래를 선점하겠다는 기대다. 과학의 날 제정 이유 역시 과학기술 혁신 분위기를 확산시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데 있다. 이 문장은 교과서에서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다르게 들린다. 그 기대는 결국 개인의 성적표와 이력서로 내려온다. 학점, 자격증, 연구 경험.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된다.

나는 여대생으로서 이 기대를 몸으로 느낀다. 발표 준비를 하며 밤늦게까지 자료를 찾다 보면, 의자에 눌린 허벅지의 감각이 먼저 온다. 몸은 분명 피로를 호소하는데, 국가는 묻지 않는다. “지금 힘드니?” 대신 “결과는?”을 묻는다. 과학의 날을 둘러싼 국가의 서사는 거대하지만, 그 무게는 아주 개인적인 신체 위에 얹힌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체력 관리도, 자세도, 숨 쉬는 리듬도 모두 생존 전략이 된다.

과학이 국가의 도구가 될 때, 개인은 도구를 다루는 손이 된다. 손은 피로해지고, 때로는 상처를 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은 멈출 수 없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과학의 날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축하보다는 점검, 환호보다는 질문. 이 기대의 구조 속에서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과학 전공생도, 비전공생도 힘든 이유

과학이 어렵다는 말은 너무 흔하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정체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전공생은 전공생대로, 비전공생은 비전공생대로 힘들다. 수학 공식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 통계 그래프를 해석하다가 길을 잃는 기분, 영어 논문 첫 페이지에서 숨이 막히는 감각.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에 가깝다.

나는 비전공자에 가깝지만, 교양 과학 수업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교수님의 말은 빠르고, 슬라이드는 빽빽하다. 그럴 때 나는 내 몸을 다시 느낀다. 등을 곧게 펴고, 어깨를 열고, 호흡을 깊게 한다. 신기하게도 자세를 바로 하면 머리도 조금은 맑아진다. 과학을 이해하는 데 몸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대학에 와서 배웠다. 이건 교과서에 없는 정보다.

여대생으로서 느끼는 또 다른 어려움도 있다. 질문을 던질 때의 시선, 발표할 때의 긴장.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나의 외모와 몸선을 동시에 인식한다. 숨기기보다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고, 이 몸으로 과학을 배운다. 바디 포지티브는 선언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다. 과학 수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택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도 과학을 놓지 않는 이유

이렇게 힘들다면, 왜 계속 과학을 붙잡고 있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과학은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제를 쪼개고, 원인을 찾고, 가설을 세우는 과정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감정이 요동칠 때, 나는 잠시 멈추고 상황을 분석한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지, 이 감정의 변수는 무엇인지. 과학적 사고는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휘두르지 않게 해준다.

과학의 날은 그래서 내게 의미가 있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내 하루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과학. 숫자와 공식 사이에서 허덕이면서도, 그 속에서 사고의 근육을 키우는 경험. 이 경험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찰스 다윈의 이름으로 시작된 과학데이가,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고 싶다.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선다. 피곤한 얼굴이지만,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선이 있다. 이 몸으로, 이 생각으로, 나는 내일도 과학을 배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 더 나답게 살기 위해서. 과학의 날은 그렇게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