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자, 하루의 리듬이 바뀌었다. 아침마다 옷장을 열고 오늘의 나를 고르는 시간, 강의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느껴지는 허벅지의 힘과 균형, 유리창에 비친 몸선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순간들. 몸은 내가 살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고, 마음은 아직도 새로 배울 게 많다. 그런 날이었다. 교양수업 과제로 ‘기념일’을 조사하라는 공지가 떴고, 무심코 클릭한 주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시험지에서 스쳐 지나간 그 이름. 연도와 장소를 외우던 기억만 남아 있던 그 단어가, 이번에는 노트북 화면을 넘어 내 하루로 들어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의자를 당겨 앉아 자세를 고쳤다. 시험을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싶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따라가며 숨을 고르고, 뜻을 되뇌었다. ‘임시’라는 말의 무게, ‘정부’라는 말의 결기. 그날의 캠퍼스는 유난히 밝았고, 나는 처음으로 역사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캠퍼스의 오후, 시험범위를 벗어난 만남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오후, 햇빛이 길게 드리운 산책로에서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몸은 솔직하다. 긴 다리의 리듬, 허리와 골반이 만들어내는 균형, 스스로를 긍정하려는 작은 용기. 그날의 나는 내 몸을 숨기지 않고, 동시에 생각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자료를 찾으며 가장 먼저 느낀 건 ‘거리감의 붕괴’였다. 예전엔 문제집의 표 안에서만 존재하던 ‘임시정부’가, 이번엔 사람의 선택으로 보였다. 시험용 암기에서 벗어나자 질문이 생겼다. 왜 굳이 그때, 그 이름이었을까. 왜 해외였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캠퍼스의 소음은 배경음이 되었고, 나의 호흡이 글의 리듬을 만들었다. 나는 지금을 사는 스무 살이지만, 선택의 순간 앞에서는 누구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과 확신이 교차하고,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뒤따라오는 그 순간. 역사도 그렇게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그날의 오후는, 시험범위를 벗어난 첫 만남의 기록으로 남았다.
1919년 4월 13일, ‘임시’라는 이름의 결기
1919년 4월 13일, 3·1운동의 함성이 국경을 넘어 이어지던 때,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토도, 군대도 없는 상황에서 ‘정부’를 먼저 세운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사라지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 나라의 틀을 미리 세우겠다는 결기. ‘임시’라는 단어는 약함이 아니라 유연함이었다. 대통령제, 입법과 사법의 개념을 담아 국가의 모양을 상상했다는 사실은, 읽을수록 숨이 길어졌다. 이후의 역사도 이어졌다.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부터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는 국가보훈처장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광복회원이 함께하는 합동추모제전이 거행되었다. 기념일 제정에 대한 검토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긴 시간 이어졌고, 마침내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으로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문장이 명시되었다. 1989년에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으로 법정기념일이 되었고, 2018년 11월 개정으로 날짜가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조정되었다. 연표처럼 보이던 문장들이, 그날은 선택의 연쇄로 읽혔다.
헌법의 문장과 현재의 나, 이어지는 호흡
자료를 덮고 창가에 섰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빛이 피부 위에 번졌다. 내 몸은 아직 완성형이 아니지만, 분명 나의 역사다. 헌법 전문 속 한 문장—임시정부의 법통—은 국가의 뿌리를 말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태도를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정 이유가 ‘정통성 공고화와 민족자존 의식 확립’이라면, 오늘의 나는 무엇을 공고히 하고 무엇을 존중하는가.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는 연습, 시선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는 자세,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는 감각. 나라가 없던 시대에도 스스로를 국가로 선언했던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의 나를 선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기념일은 더 이상 달력의 작은 글씨가 아니다. 캠퍼스에서 숨 쉬는 나와 연결된 날짜, 과거의 결기가 현재의 일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그렇게 역사는,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내 안에 남았고, 나는 그 호흡을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