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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한국수어의 날 – 손끝에서 시작되는 감각의 언어

by JiwonDay 2025. 12. 15.

아침 등교길 횡단보도 앞 전광판에서 수어 통역 화면을 본 날이었다. 빨간 불이 켜진 동안, 화면 속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표정은 또렷했다. 나는 무심코 거울처럼 유리창에 비친 내 몸을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몸은 늘 먼저 반응한다. 긴 코트 아래로 이어지는 허리선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세하게 변했고, 장갑을 벗은 손가락 끝은 차가운 공기와 부딪혀 감각을 깨웠다. 요즘 뉴스에서도, 공공기관 안내에서도 수어 통역이 자연스레 붙어 있다. ‘왜 지금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언어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 소리가 지배하던 공간에 손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언어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읽는 것이라는 걸. 수어가 보인다는 건, 그동안 가려졌던 몸의 대화가 표면으로 올라온다는 뜻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내 몸을 더 또렷하게 인식했다. 어깨를 펴고, 손목을 돌리고, 호흡을 고르며 걷는 이 일상이 사실은 하나의 언어라는 생각. 그래서 오늘, 2월3일 한국수어의 날이라는 문장이 내 하루의 리듬에 들어왔다.

세 장면에서 수어를 표현하는 젊은 여성 모습

 

보이지 않던 언어 공동체를 만나는 날

한국수어의 날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언어 공동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다. 나에게 언어는 자존감이고, 정체성이고, 때로는 몸을 긍정하는 방식이다. 스물네 살의 나는 내 몸을 숨기지 않는다. 걷는 법, 서는 법, 손을 드는 각도까지 내가 선택한다. 수어 사용자에게도 언어는 그와 같다. 손의 각도, 표정의 농도, 몸의 중심 이동이 곧 의미다. 소리가 없는 세계는 결핍이 아니라 다른 밀도다. 그 밀도 속에서 사람들은 관계를 만들고, 농담을 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수어 통역 화면을 보며 느꼈다. 우리가 ‘배려’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정’이라는 걸. 언어 공동체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투명해진다. 나는 내 몸의 곡선을 긍정하듯, 그들의 언어를 존중하고 싶다. 관능이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받지만, 나에게 관능은 감각을 신뢰하는 태도다. 수어는 감각의 언어다. 손끝에서 시작해 팔과 얼굴, 몸 전체로 번진다. 그 움직임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시선의 문제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뿐, 사라진 적은 없다.

언어가 곧 자존감이 되는 순간들

언어가 자존감이 되는 순간을 나는 일상에서 자주 겪는다. 소개팅 자리에서 내 목소리가 떨릴 때,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며 숨을 고를 때, 몸을 곧게 세우는 선택을 할 때. 수어 사용자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통역이 제공되는 순간, 뉴스가 자기 언어로 전달되는 순간, ‘나도 여기 있다’는 감각. 한국수어의 날은 그 감각을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날이다. 법과 제도가 언어를 호명할 때, 개인의 자존감은 확장된다. 수어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언어다. 문법이 있고, 은유가 있고, 지역성과 세대성이 있다. 손끝의 떨림 하나에도 뉘앙스가 담긴다. 나는 그 섬세함이 좋다. 내 몸을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와 닮았기 때문이다. 몸을 긍정하는 건 쉽지 않다. 언어를 긍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날이 필요하다. 잊히지 않도록, 반복해서 말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만큼은 손끝의 언어를 떠올리며

마무리는 늘 일상으로 돌아온다. 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오늘 하루만큼은 손끝의 언어를 떠올려보자. 엘리베이터 안내 화면에 수어가 있는지, 행사에 통역이 제공되는지, 영상에 자막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방식의 소통을 상상해보자. 나는 내 몸을 드러내는 선택을 하며 세상과 협상해왔다. 노출이 아니라 주도권의 문제였다. 수어도 같다. 들리지 않는다고 침묵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부재가 아니다. 우리가 한 걸음만 가까이 가면, 같은 세상을 공유할 수 있다. 2월3일 한국수어의 날은 기념일이 아니라 초대장이다. 감각을 열고, 시선을 낮추고, 손을 움직이는 연습을 해보라는 초대. 그 초대에 응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겠지만, 방향은 같다. 더 많은 언어가, 더 많은 몸이, 같은 공간에서 존중받는 사회. 오늘 나는 그 방향을 내 손으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