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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문화유산 방재의 날 – 숭례문 앞에서 멈춘 마음

by JiwonDay 2025. 12. 15.

나는 불을 기억한다. 정확히는 불길 그 자체보다, 화면 너머에서 번지던 침묵을 기억한다. 2008년 겨울, 숭례문이 타들어가던 밤의 뉴스 장면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카메라는 붉은 불꽃을 확대했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말이 사라졌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문 하나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몸 어딘가가 함께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문화유산이라는 단어를 교과서에서만 배웠다. 하지만 그 불길 앞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문화유산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걸. 그날 이후 나는 유난히 오래된 것들에 시선이 갔다. 낡은 기와의 곡선, 비에 닳은 돌계단, 손때가 남은 문살. 그 앞에 서면 이상하게 내 몸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살아 있다는 감각,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 그래서 2월 10일, 문화유산 방재의 날이 다가오면 나는 매번 숭례문을 떠올린다. 불에 타버린 과거가 아니라, 그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묻기 시작했는지를. ‘우리는 정말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문화유산 방재 의미를 표현한 포스터

① 불타는 문 앞에서 느꼈던 상실의 온도

숭례문 화재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속 화면이었고, 반복 재생되는 뉴스 클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이상할 정도로 육체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다. 가슴이 조여 오고, 어깨가 굳어지고, 숨이 짧아졌다. 마치 누군가의 집이, 아니 내 집의 문이 타는 것처럼. 문화유산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은 물건을 잃는 슬픔과는 다르다. 그건 기억의 일부가 증발하는 느낌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에 있었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의 붕괴. 그래서 더 아프다. 그날 이후 ‘방재’라는 단어는 내게 추상적이지 않다. 불, 물, 붕괴 같은 재난은 뉴스 속 사건이 아니라 피부에 닿는 현실이다. 지금의 나는 24살, 스스로의 몸과 욕망을 인식하는 나이가 되었고, 동시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에 더 예민해졌다. 내 몸도, 도시도, 유산도 모두 돌보지 않으면 쉽게 망가진다는 사실을 안다. 숭례문은 그렇게 내 감각을 열어젖힌 사건이었다. 문화유산을 잃는다는 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잠시 잊어버리는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② 질문 이후, 한국 사회가 바꾼 것들

숭례문 화재 이후 한국 사회는 분명히 변했다. 그 변화는 조용하지만 집요했다. 문화재 방재 시스템은 더 이상 형식적인 점검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문 방재센터가 구축되고, 화재 감지 시스템은 정밀해졌으며, 야간 순찰과 실전 훈련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밤을 새우며 지키고 있다는 사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내 등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안정감이다. 문화유산 방재는 기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연 자재로의 보강, 자동 소화 장비, 드론과 CCTV 활용 같은 기술적 진보는 눈에 띄지만, 그 이면에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다짐이 있다. 나는 이런 다짐이 좋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다시 손을 뻗는 모습이 좋다. 내 몸을 돌보는 일과 닮아 있다. 상처를 입은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보살피는 것처럼, 사회도 아픔 이후에 성숙해진다. 문화유산 방재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점검하고 질문해야 하는 살아 있는 과정이다.

③ 유산을 지킨다는 것, 나를 지킨다는 것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과거를 박제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내 몸을 긍정한다. 선이 있고, 흔적이 있고, 아직 미완인 상태 그대로의 나를. 문화유산도 그렇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소중하다. 2월 10일 문화유산 방재의 날은 그래서 기념일이 아니라 다짐의 날이라고 생각한다.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기도가 아니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날. 숭례문에서 시작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안고 오늘도 오래된 골목을 걷는다. 내 숨과 돌담의 숨이 잠시 겹치는 순간을 느끼면서. 지킨다는 건, 결국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