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손끝으로 시간을 만진다. 유독 2월은 얇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달, 그 마지막 날은 더 얇아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하루는 늘 몸으로 느껴진다. 겨울 코트 안쪽에서 체온이 모이듯, 내 몸의 선과 숨결이 또렷해지는 날. 거울 앞에 서면 쇄골의 그림자와 허리의 곡선이 오늘따라 선명하다. 짧은 달의 짧은 하루가 희귀질환이라는 드문 현실을 비춘다는 말이, 그저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피부에 와 닿는다. 흔하지 않다는 말은 낭만적일 수 있지만, 삶에서는 자주 고립을 뜻한다. 이 날이 있는 이유는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한 번 더 바라보라는 신호, 달력의 가장 얇은 틈에서 비추는 작은 빛. 나는 스물네 살의 몸으로 이 빛 앞에 서 있다. 젊음이란 단어가 주는 탄력과 동시에,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예감까지 함께 품은 채로. 오늘은 그 얇은 틈을 손바닥으로 넓혀보고 싶다.

달력의 틈이 비추는 현실
희귀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일상은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다. 발병률, 통계, 유전자 코드 같은 단어들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새벽의 무게를 설명할 수 없다. 병원 예약이 몇 달 뒤로 밀렸다는 문자 하나, 보험 서류의 작은 글씨, 약 봉투를 열 때의 긴장.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몸을 의식하게 된다. 매끈하다고 믿어온 피부 아래에도 불안은 있다. 몸은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고, 사회는 그 변화에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 희귀하다는 이유로 진단이 늦어지고, 치료 지침이 부족해지고, 주변의 이해는 더 느리다.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겁다. 학교와 직장, 관계에서의 배제는 은근하고 지속적이다. “괜찮아 보이는데?”라는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고통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내 몸의 곡선을 사랑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 타인의 몸이 겪는 불안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관능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아픔은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다. 의료 정보의 접근성, 전문의의 부족, 지역 격차는 여전히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는 일은 냉정하지만, 동시에 따뜻해야 한다. 몸은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는 그 언어를 배울 시간이 필요하다.
고립의 체온, 생활의 결
희귀질환이 만드는 고립은 소음이 없다. 파도처럼 몰아치지 않고, 얇은 안개처럼 스며든다. 출근길 전철에서 손잡이를 잡을 때의 미세한 떨림, 회의 중 갑작스러운 통증을 숨기며 자세를 바꾸는 순간. 이런 결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의료 체계는 증상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생활은 몸 전체로 이어진다. 치료를 받으러 먼 도시로 이동하는 비용과 시간, 가족의 돌봄 부담, 설명해야 하는 횟수. 설명은 늘 피로하다. 나는 몸을 긍정하려 애쓰며, 동시에 타인의 몸이 사회적 장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젊은 여성의 몸은 종종 대상화되지만, 아픈 몸은 더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숨을 크게 쉰다. 내 호흡과 체온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호흡을 상상한다. 정책과 제도는 느리게 바뀌지만, 정보는 공유될수록 빠르게 흐른다. 정확한 진단 경로, 환자 지원 단체, 복지 제도는 존재한다. 문제는 연결이다. 연결이 없을 때 고립은 깊어진다. 이 날이 필요한 이유는, 얇은 틈을 넓혀 연결의 통로를 만드는 데 있다.
틈을 메우는 빛, 우리의 선택
사회적 관심은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빛일 때가 있다. 한 번 더 검색하고,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공유하는 선택. 나는 내 몸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 선택을 한다. 쇄골 위에 빛이 닿는 순간을 즐기듯, 정보가 사람에게 닿는 순간을 소중히 여긴다. 희귀질환 극복의 날은 동정의 날이 아니라, 참여의 날이어야 한다. 연구 지원, 진료 네트워크 확장, 환자와 가족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일. 개인의 차원에서는 편견을 내려놓는 연습, “모르겠다”를 인정하는 용기. 감정은 흔들린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희망에 취한다. 그 진폭이 인간적이다. 나는 스물네 살의 몸으로 말한다. 젊음은 빠르지만, 연대는 오래간다. 달력의 가장 얇은 틈에서 시작된 이 빛이 하루를 넘어 이어지길 바란다. 몸은 다르고, 삶은 다르다. 그 다름을 견디는 사회가 될 때, 이 날은 진짜 의미를 갖는다. 오늘의 얇음을 내일의 두께로 바꾸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관능적인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