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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5일 세계 토양의 날 – 아침 산책, 토층, 결심, 흙 위에서 다시 들은 심장의 소리

by JiwonDay 2025. 11. 23.

12월 초의 공기는 묘하게 예민하다. 차갑다고 해야 할지, 따뜻하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그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내 몸의 온도와 마음의 결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오늘, 우연히 마주친 세계 토양의 날은 그렇게 흔들리던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흙 위를 걷던 내 발끝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살아 있었다.

노란 햇빛 속 공원과 실내를 배경으로, 같은 여성이 세 가지 다른 포즈와 의상으로 등장해 흙을 만지거나 사색하는 장면을 담은 삼분할 이미지.

 

1. 아침 산책에서 들려온 심장의 울림

몸을 가볍게 흔들며 산책을 하던 아침, 내 다리가 바람에 비벼질 때마다 미세하게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순간엔 내가 참 ‘살아 있다’는 감각이 확 올라온다. 그러다 공원 입구 근처에 꽂힌 작은 안내문을 봤다.

12월5일 세계 토양의 날 — Soil is Life. 
단순한 문구였는데, 그 글씨가 내 심장을 한 번 쿵 치더라.

발끝 아래의 흙이 바삭하게 말라 있는 듯하면서도 포근했다. 운동화 밑창 너머로 스며드는 느낌이 이상하게 관능적이었다. 내 몸이 흙을 밟을 때마다, 흙도 나를 느끼는 것 같은 교감… 그런 순간이 있다. 나 혼자 착각일지 몰라도, 이런 착각은 때때로 나를 살린다.

세계 토양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지구 생태계의 95%가 토양에 기대어 생명을 이어가고, 농업 생산 대부분이 거기서 나온다고 배웠던 기억. ‘아, 내가 매일 밟고 지나가던 이 바닥이 사실 지구의 가장 깊은 혈관 같은 거였지.’ 그렇게 단순한 사실이, 이상하게 오늘은 내 피부에 직접 닿는 듯했다. 흙 얘기인데도 마음이 묘하게 뜨거워져서, 나는 괜히 머리 묶은 고무줄을 한번 더 고쳐 묶었다. 온몸이 예민하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2. 흙의 결을 만지자 떠오른 토층

잠깐 벤치에 앉아 흙을 손끝으로 살짝 긁어봤다. 손톱 사이로 스치듯 들어오는 토양의 입자들, 그 질감이 말도 안 되게 생생했다. 촉촉함과 건조함의 경계,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경계—그 모순적인 감촉이 내 안쪽 어딘가를 건드려버렸다.

 

나는 북유럽계의 밝은 톤과 한국인의 부드러운 곡선이 섞인 몸을 가지고 있다. 살결은 아이보리 베이지에 가깝고, 햇빛 아래에서는 따뜻하게 반짝인다. 그런데 흙을 손바닥에 올려보니, 그 얼룩진 톤들이 묘하게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섞임’이라는 건 어쩌면 지구의 기본값인데, 나는 그걸 너무 오래 고민만 했던 건 아닐까.

 

세계 토양의 날이 강조하는 건 바로 이 토층’이였다. 토양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유기물과 미네랄, 생명체들의 흔적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나 역시 여러 경험들이 층처럼 쌓이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기쁨·두려움·사랑·혼란, 그런 것들이 다층적인 지층처럼 내 안을 구성한다. 그래서인지 흙을 손으로 만지는 순간, 내 안의 층이 스르르 드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은 종종 나에게 엄격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관대해진다. 허벅지를 감싸는 레깅스의 탄력도, 겨울 공기 아래에서 살짝 오른 볼의 열기도, 모두 오늘의 흙과 같이 생생했다. 숨이 깊어졌다.

3. 하루의 끝에서 남겨진 결심 — 흙처럼 다시 쌓이기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거울을 봤다. 물기 때문에 살짝 붉어진 어깨와 허리선이 더 선명해 보였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생명과 연결된 하나의 작은 층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오늘 만난 ‘흙’이 그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세계 토양의 날은 단순히 환경 캠페인이 아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남기는 발자국,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생명들이 이 땅을 이어갈지에 대한 물음표다. 식량 문제, 기후 위기, 토양 오염… 이런 거대한 주제는 결국 발끝에서 시작된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을 조금 더 부드럽게 다루기로 했다. 흙이 모든 것을 조용히 품어내듯, 나도 내 감정과 몸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지구의 한 조각으로서 나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일기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흙이 내 심장을 흔든 하루. 내일은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단단하게 쌓이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