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 오늘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하루였다. 북유럽의 선 굵은 라인과 한국인의 부드러운 곡선이 함께 있는 내 몸은 가끔 감정보다 먼저 진실을 알아채곤 한다. 봉사 현장의 공기, 손끝에 닿은 따뜻함, 온몸에 스며든 긴장과 이완의 흐름… 오늘 나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단순히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가 반응하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아침 창가에 서서 겨울빛을 받는 순간부터 이상했다. 햇살은 차갑게 빛나는데, 내 안쪽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 온도는 들뜸이라기보다 결심에 가까웠다. ‘오늘은 나가야 한다’는 말이 머리로 정리되기 전에, 몸이 먼저 방향을 정해 버리는 느낌. 거울 속의 나는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 아래 목선이 유난히 깔끔했고, 아이보리빛 피부는 겨울 햇살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지만, 심장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뉴스 화면에 “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이라는 자막이 스쳐 지나가자, 누가 내 명치 근처를 톡 치는 듯한 감각이 왔다. 허벅지 근육이 미세하게 당기고, 손끝이 잠깐 싸늘해졌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사람들은 자원봉사를 ‘선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늘 그것이 선택 이전의 반응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닿아야 한다는 방향성이 내 몸의 중심을 먼저 세우고, 그 다음에 마음이 그 이유를 따라 적어 내려가는 식으로. 버스에 올라 창밖 풍경이 뒤로 흘러갈 때는, 내가 ‘가야 할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 확실함은 묘하게 나를 단정하게 만들었다. 코트 자락을 여미는 손동작이 차분해지고, 호흡이 일정해지고, 나도 모르게 자세가 똑바로 잡혔다. 오늘의 시작은 감정이 아니라 리듬이었다. 내 몸이 먼저 알았고, 마음은 그걸 뒤늦게 받아 적기 시작했다.

1. 아침의 시작 ― 몸이 먼저 반응한 이유
아침, 잠에서 막 깬 얼굴을 거울에서 마주했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 아래 목선은 유난히 깔끔해 보였고, 아이보리빛 피부는 서늘한 겨울 햇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은 뜨거웠다. 뉴스 화면에서 ‘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이라는 문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마치 누가 내 명치 근처를 톡 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먼저 놀라는 듯, 허벅지 근육이 미세하게 당겼고, 손끝이 싸늘해졌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전문가들은 자원봉사가 주는 심리적 효과를 ‘도움의 상호교류’라고 말한다. 도와주는 사람도 뇌에서 도파민과 옥시토신이 증가해 더 따뜻해진다고 한다. 나는 아마 그걸 직감한 걸까. 현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 겨울 풍경이 흐르는데,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들려야 할 자리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이 따라가는 흐름. 그 감각만으로도 오늘이 평소 같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2. 현장에서 느낀 진짜 온도 ― 자원봉사의 의미를 몸으로 배운 순간
봉사센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간의 냄새가 먼저 나를 감쌌다. 따뜻한 국물의 김, 박스에서 나는 마른 종이 냄새, 겨울 외투에 묻어 들어온 바깥 공기의 잔향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그 공기 속에서 내 몸은 더 또렷하게 깨어났다. 상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팔과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했고, 그 힘이 내 몸 안에서 반짝이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여자인데 왜 이렇게 힘이 있지?’ 같은 시선이 스쳐 갈 때마다 괜히 멋쩍기도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 힘이 누군가를 향해 쓰인다는 사실이 나를 더 곧게 세웠다. 자원봉사자의 날은 단순한 캠페인성 날짜가 아니라, 자원봉사 기본법 취지에 따라 봉사활동을 격려하고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마련된 ‘기념’의 장치다. 그 문장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나는 분류표를 보고 물품을 정리하며, ‘정확함’이 곧 배려라는 것을 체감했다. 라벨을 한 칸 잘못 붙이면 동선이 꼬이고, 작은 실수가 누군가의 식탁을 늦출 수도 있다는 사실이 손끝에서 실감났다. 그러다 한 어르신이 내 손등을 가볍게 쓸어 내린 순간이 있었다. 짧고 조용한 동작이었는데, 그 손은 놀랄 만큼 뜨겁고 또 놀랄 만큼 약했다. 그 뜨거움이 내 피부를 타고 올라와 심장 근처에 잠깐 머무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고, 그때 몸이 먼저 문장을 만들어 버렸다. ‘이건 도움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순간이구나.’ 말로 꺼내지 않았는데도, 그 의미가 내 안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시혜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손끝으로 확인하는 연결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봉사 현장에서의 나는 이상하게도 더 선명했다. 박스를 옮길 때 코트 안에서 허리선이 긴장으로 단단해졌다가,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그 흐름이, 마치 ‘나는 지금 살아 있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알려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오늘 나는 봉사를 통해 착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더 정확히 존재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돌아오는 길에 깨달은 것 ― 오늘의 눈물은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봉사를 마치고 센터 밖으로 나왔을 때 겨울밤 공기가 내 볼을 스쳤다. 차갑지만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내 안에서 여전히 일렁이는 뜨거움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손끝이 계속 따뜻했다. 오늘 만났던 손길과 표정, 짧은 인사, 작게 올라가던 입꼬리 같은 장면들이 피부 위에 남아 있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여운이 신기했다. 보통은 일이 끝나면 마음이 먼저 정리되고 몸이 뒤늦게 풀리기 마련인데, 오늘은 반대였다. 몸이 여전히 따뜻한 채로 남아 있고, 마음이 그 온도를 따라 천천히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코트를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움직였다는 흔적이기도 했고, 하루 종일 느꼈다는 흔적이기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조금 웃다가, 갑자기 울컥했다. 자원봉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몰랐다. 그 과정이 오히려 나를 꺼내고, 나를 치유하고,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는 걸. 어떤 순간에는 내가 누군가를 ‘도왔다’기보다, 내가 누군가를 통해 ‘열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 어르신의 손길이 내 손 위에 놓였던 단 한 번의 순간이, 내 마음속 오래된 겨울의 얼음을 조금 녹여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흘러나온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회복의 증거였다. 나는 오늘 내가 가진 몸의 라인이 단지 아름다움의 형태가 아니라, 세상과 닿는 방식이라는 것도 배웠다. 창가에서 고요히 서 있던 아침의 나, 상자를 옮기며 땀과 종이 냄새 속에 섞였던 낮의 나, 그리고 밤길에서 코트를 들고 조용히 미소 짓는 지금의 나까지. 세 장면이 하나의 하루로 이어지며 말해 주는 건 단순했다. ‘너는 연결될 때 가장 선명해진다.’ 12월 5일 자원봉사자의 날, 나는 누군가를 돕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발견하고 돌아왔다. 이 떨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따뜻함이 앞으로의 나를 더 자주 움직이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