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사라지는 곳과, 책임이 남는 곳
행정 문제를 겪은 뒤 “왜 이렇게 피곤하지?”라는 감각이 남는 이유는 개인의 성향이나 대응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과 한국은 모두 헌법과 법률 차원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규정하고 있으며, 행정 처분에 대한 불복과 소송 절차도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제도만 놓고 보면 두 나라 모두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경험에서는 일본에서는 국가나 조직이 전면에 등장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개인이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은 ‘사과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라는 태도의 차이를 묻지 않는다. 대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이 어디에서 흡수되고, 어느 단계에서 개인에게 이전되는지를 구조적으로 살펴본다. 사과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며, 핵심은 그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어떤 절차와 경로가 이미 작동했는지에 있다. 행정이 문제를 인지하는 방식과 분쟁을 처리하는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왜 어떤 사회에서는 ‘국가’가 보이고 어떤 사회에서는 ‘개인’이 보이는지가 제도적으로 설명된다.

법과 제도에서 규정된 책임의 공식적 주체
일본과 한국은 모두 공무원의 직무상 위법 행위로 손해가 발생했을 때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배상 책임을 진다는 점을 헌법과 국가배상 관련 법률로 명시하고 있다. 일본 헌법 제17조는 공권력 행사로 손해를 입은 경우 국가나 공공단체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구체화한 국가배상법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부담하는 구조를 취한다. 한국 역시 헌법 제29조와 국가배상법을 통해 동일한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법문만 놓고 보면 양국의 책임 주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행정 오류의 1차적 책임은 개인 공무원이 아니라 국가에 귀속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은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이고 한국은 개인이 책임지는 사회라고 단순히 구분하는 것은 법제도 차원에서는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차이는, 법적으로 규정된 이 책임이 실제 행정 과정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처리되고, 시민에게 어떤 형태로 전달되는가에 있다. 즉 책임의 ‘주체’보다 책임이 작동하는 ‘과정’이 체감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문제 인지와 분쟁 처리 절차, 그리고 사과의 등장 조건
책임 구조의 차이는 문제가 처음 인지되는 단계에서부터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시민의 불만이나 문제 제기가 행정상담(行政相談)이나 내부 점검과 같은 비교적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먼저 흡수되는 경우가 많다. 이 단계에서 문제는 곧바로 법적 분쟁이나 공식 사건으로 규정되기보다, 조직 내부에서 조정·검토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후에도 행정불복심사법(行政不服審査法)에 따라 행정 내부 또는 준사법적 기구를 통한 불복 절차가 비교적 두껍게 배치되어 있으며, 소송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문제 발생 후 기관이나 조직 단위가 전면에 나서 대응할 여지가 크다. 기자회견이나 사과문과 같은 공식 대응은 이 완충된 절차의 말단에서 등장하며, 법적 책임 인정이라기보다 절차적 책임 이행의 한 장면으로 기능한다. 반면 한국은 민원 접수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즉시 문서화되고 시스템에 등록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이라는 제도적 구제 수단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실제 과정에서는 개인이 자료를 수집하고 절차를 선택하며 대응을 주도해야 하는 비중이 크다. 이 때문에 공식 사과는 초기 대응에서 신중하게 다뤄지며, 책임 문제는 빠르게 문서와 법적 절차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 차이는 사과를 중시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사건’으로 규정하기 전까지 제도가 얼마나 많은 완충 단계를 제공하는가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사과는 이 경로가 충분히 작동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결과물에 가깝다.
공무원 개인 책임의 노출과 시민이 체감하는 책임의 종착지
책임이 이동하는 경로는 공무원 개인의 노출 정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은 국가공무원법과 인사원(人事院) 중심의 인사·징계 체계를 통해 문제를 조직 내부에서 처리하는 비중이 크다. 징계와 문책은 임명권자와 내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며, 외부에 개인 책임이 직접 드러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는 책임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조직 관리의 문제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결과다.
한국은 감사원법에 따른 감사·감찰 체계가 강하게 작동하며, 징계 요구와 실명 공개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열려 있다. 이 구조에서는 공무원 개인의 판단과 행위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행정 과정에서 위험 회피적 선택이 합리적인 대응이 된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직이 책임을 흡수하고 절차를 정리한다는 인상이 형성되기 쉽고, 한국에서는 문제 해결의 종착지가 개인의 대응 능력과 정보 접근성에 달려 있다는 경험이 누적되기 쉽다.
이 차이는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책임을 조직 내부에서 종료시키도록 설계했는지, 아니면 개인의 지속적인 개입을 전제로 설계했는지의 차이다. 따라서 행정 문제를 마주한 시민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과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이 문제는 어디까지 제도 안에서 처리되었는가’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과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책임이 제도 내부에서 정리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로 재위치된다.